본문 바로가기
⛪ 신앙/신학 📔

칼빈 인물 탐구 | 기독교강요 5대교리 칼빈주의 예정론 제네바개혁

by pisteuo 2021. 3. 2.
반응형

[인물 탐구 - 존 칼빈 John Calvin (장 칼뱅)]

※내가 이해하기 쉽게 내 방법으로 정리해보는 '인물 탐구'

 



관련 키워드

#종교개혁 #종교개혁자 #기독교강요 #제네바개혁 #예정론 #성찬론 
#교회의 직분론
#장로교의 아버지 
#가장 뛰어난 개신교 신학자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복지 정책의 아버지 
#서구 민주주의의 아버지

 

프로필

 • 출생과 사망 : 1509-1564
 • 탄생지 : 프랑스 Noyon(노용)

 

 

칼빈의 생애와 목회 

※ 여러 자료 및 영상들을 참고하여 정리한 글입니다(참고 자료는 이 글 하단의 References를 참고하세요)


  어려서부터 명석함과 근면함을 나타냈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많은 교육을 받게 했다. 그는 조금 먹고 조금 자는 대신 많은 양의 공부를 했다. 27의 나이에 라틴어로 '기독교강요'를 쓴다. 
  당시 유럽에서는 루터의 영향으로 각지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칼빈은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자정까지 연구에 몰두하고 새벽 4,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다. 이는 그의 신학적 철학적 훈련과 함께, 완성된 개혁자로 일할 수 있게 준비시키는 일을 하게 된다. 몸이 유난히 약했던 그는 13가지나 되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공부와 연구에 몰두하게 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의 Basel(바젤)에 머문다. 언제 정확히 회심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록을 통해 그가 분명한 회심을 경험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그 루터와 츠빙글리의 글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며 칼빈은 카톨릭과 등지고 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1536년 3월 마침네 Basel에서 기독교강요(라틴어: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초판을 쓴다. 기독교강요 초판은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의 신앙을 변호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기독교강요 출판 후 프랑스 Paris(파리)로 돌아간 칼빈은 Strasbourg(스트라스브룩)로 갈 생각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길이 막히자 스위스의 Geneva(제네바)를 통과하여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Geneva에서 개혁은동을 일으키고 있던 파렐(Parel)은 칼빈을 찾아가 개혁운동을 위한 협력을 구한다. 그러나 칼빈은 본래 자기는 내성적이고 수줍음과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산더미와 같은 반대자의 세력과 더불어 싸울 힘이 없다며 그 초청을 거부했다. 칼빈은 더이상 복잡한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파렐은 무섭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의 학문 연구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오! 만약 당신이 이 주님의 사역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저주하실 것이요!". 결국 칼빈은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칼빈은 그곳에서 성경공부부터 시작했다. '평일에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다'고 가르쳤고, 그래서 그는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1536년 10월 칼빈은 로마 교회의 한 수도사와 논쟁을 하게 됐다. 로마 교회의 신부가 교부들의 저서에서 여러 구절을 인용하면서 로마 교회에서 주장하는 성찬론이 옳다고 주장한 것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칼빈이 '터툴리안', '트리소스톰', '어거스틴' 등을 비롯한 많은 교구들의 서적을 원고 없이 자유롭게 인용하며 로마 카톨릭의 성찬론을 반박했다. 이후 칼빈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결국 추방 당한 칼빈은 Basel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후 Strasbourg에 있는 난민 교회를 맡게 된다. 여기서 처음으로 목회다운 목회를 하게 된다. 심방도 하고, 주석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때 시편 찬송을 짓기 시작하기도 했다. 이 즈음에 기독교강요 2판이 나온다. 
  칼빈은 Strasbourg에서 '이델렛 드 뷔르(Idelette de Bure)라는 과부와 결혼을 한다. 그녀는 삶을 마칠 때까지 칼빈을 도와 섬겼다.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다. 1541년 5월 제네바 시의회가 칼빈과 파렐에 대한 추방령을 취소하고 칼빈을 초청할 것을 결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9월 13일, 칼빈이 제네바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의 법규를 제정하는 일이었다. 이 때 '목사', '장로', '집사', '교사' 등 4직분론을 전개하였다. 
  1564년 2월 마지막 설교를 하다가 쓰러졌다. 쓰러진 후 병석에서 집필을 계속해서 '여호수아 주석'을 완성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사람들은 큰 장례식을 치워주길 원했지만 그는 유언으로 "나의 무덤을 화려하게 만들지 말고 아주 평범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칼빈의 무덤이 어딘지도 모르게하라"고 하였다.

 

 

 

칼빈 어록

"평일에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다"
"국왕이나 대주교나 그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의 절대적 충성을 요구할 수 없다"
"사랑과 믿음은 함께 있다"
"어떤 인간도 절대 권력을 주장해선 안된다"
"나의 무덤을 화려하게 만들지 말고 아주 평범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칼빈의 무덤이 어딘지도 모르게하라"

 

 

칼빈의 수제자

 • 존 낙스(John Knox, 1514-1572)

 

 

 

칼빈 입문서 추천

 • 칼빈의 '기독교 강요(라틴어: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36)'

   - 27세 나이에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종교개혁 개신교 신학의 교과서와 같은 엄청난 책이다.

 • 3단계 추천: 임마누엘 스티켈베르거의 '하나님의 사람 칼빈' - 윌리엄 부스마의 '칼빈' - 부르스 고든의 '칼뱅'

   - 추천인 :  최경환 연구원(공공신학 전공자, 유튜브 '최경환의 신학공방')

 • 헤르만 셀더르하위스(세계 칼빈학회 회장 역임, 칼빈에 대해 권위자. 한국 교회 정서에 잘 맞는 책) '칼빈'

   - 추천인 : 김삼환 목사님, 오정현 목사님

 • 와타나베 노부오(아시아 칼빈학회 회장역임, 일본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 고백교회 그리스도인)의 '기독교강요란 어떤 책인가?'

 

 

 

References

 • 존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사업회

 • 칼빈 다큐(칼빈탄생 500주년 기념 영상)

   - 제 1부. 칼빈의 생애와 목회

   - 제 2부. 칼빈의 후예들

   - 제 3부. 칼빈의 사상

 • 한홍목사의 '존 칼빈의 제네바 개혁 강의'

 • 유튜브 '오늘의 신학공부'의 영상, '종교개혁가 장 칼뱅 (존 칼빈) 입문서 11권 추천'

 

 

 

 

 

😊

반응형